대학 신입생 시절 '서양사개론'이라는 교양과목을 들었다. 그 과목을 가르치시던 교수님은 '법'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서양사에서 법은 많은 경우 서민과 약자보다는 '강자의 이익대변 도구'였다는 평가를 내리셨다. 법대 신입생으로 법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과 기대감을 갖고 있던 필자에게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법=강자의 이익대변 도구'라는 당시의 법비판은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년사에서부터 강조한 '법질서 확립'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요즘 법무부가 무척 바빠 보인다. 최근에는 법질서 캠페인 전국 확산을 위해 수도권의 성인 남녀 300명을 대상으로 '법의식' 설문조사도 실시했다. 이 설문조사 결과에는 우리 국민 법의식의 현 주소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우선 국민들은 필자가 대학 신입생시절 들었던 아픈 법비판과 동일한 입장의 법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응답자의 92.7%가 현 한국사회에서 준법과 관련해 '기득권층의 위법이 가장 큰 문제'라고 답했다. '법보다 재산이나 권력의 위력이 더 큰 것 같다'고 대답한 응답자도 무려 91%에 이른다. 국민 열명 중 아홉명이 법을 기득권층에 우호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다.

재벌이나 유력 정치인 등 사회 기득권층의 특권적 행태나 이들에 대한 솜방망이식 법적용에 국민적 불만이 정점에 다다르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사법당국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잣대로 법과 원칙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국민의 지적도 이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의 머릿속에 '특권층에만 유리한 것이 법'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한, 아무리 정부가 준법을 이야기해봤자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법 적용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면, 이러한 국민들의 부정적 법의식을 바꿀 수 없고 법질서 확립을 통한 선진국 진입도 요원한 꿈에 머물 수밖에 없다.

법이 가장 먼저 다뤄야할 분야로 1순위인 27.3%의 응답자가 '공직자 부패·비리 척결'을 말한 반면, 이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강조한 이후로 최근 검찰과 경찰이 역점사항으로 추진하고 있는 '불법 시위 등을 통한 떼법 근절'은 2.3%에 그친 결과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민들은 정부를 향해, 힘없고 하소연 할 데 없는 서민들의 한풀이 시위를 '떼법'으로 몰아세우며 엄단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보다는, 정부공무원부터 각종 만성화된 부패와 비리척결 의지를 행동으로 옮겨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법의식이 이렇게 부정적이다 보니, 법질서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11%의 응답자가 '경직된 느낌'을, 10%의 응답자가 '공평치 못한 적용'을 꼽았다고 한다. 갈 길이 참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진정 '법질서 확립과 이를 통한 선진국 진입'을 원한다면 정부는 법에 대한 국민들의 이러한 부정적 의식부터 바뀔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그 첫 출발은 정부 스스로의 준법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국민 모두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바라며 정부가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늘은 제 45회째를 맞는 법의 날. 법질서 확립을 위해 국민적 분발에 앞서 정부의 분투를 촉구한다.

* 이 글은 법과사회이론학회의 공식적인 견해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 헌법학

[국민일보,  2008.04.24 18:32]